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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_1 김 부장 편

by J____H 2023.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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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부장은 모 대기업에 25년째 근무 중이다. 동갑내기 아내와 서울에서 자가로 살고 있으며 아들도 제법 커서 대학생이다. 연봉은 1억 정도 되며 실 수령액은 650에서 700만 원 정도 된다. 가끔 보너스도 나온다. 주식도 1천만 원 정도 투자하고 있다. 10년째 하고 있지만 크게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 남들은 성공한 사람이라며 부러워한다. 부모님도 내 아들 성공했다며 뿌듯해한다. 김 부장은 부장 직급을 달기 전까지 대기업의 복지를 누리고 하청업체의 접대를 받으며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다. 사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부장이 되고 나니 동기들이 하나 둘 회사를 떠나기 시작한다. 늙어 죽을 때까지 나에게 월급을 따박따박 줄 것 같던 이 회사가 내 동기들을 내보내기 시작한다. 김 부장은 슬슬 불안해진다. 갑자기 내 통장에 이 돈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마음속으로 행복 회로를 돌려본다. 설마 회사에서 당장 내보내겠어? 만약에 잘리면 아들도 다 컸겠다 집 팔아서 시골 가서 살지 뭐. 김 부장의 통장에는 수천만 원이 있다. 주식 계좌에는 1천에서 2천만 원어치가 있는데 날마다 오르락내리락한다. 김 부장은 의문이다. 25년간 회사를 다녔는데 내 통장에는 왜 이것뿐이지? 본인의 씀씀이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불안감을 이기기 위해 또 행복 회로를 돌린다. 임원 달면 되지 뭐. 임원 달면 연봉이 두세 배는 될 텐데. 그래도 여전히 불안하다. 이전보다 더 장표 작성에 집착하고 팀원들을 압박하고 실적에 매달린다. 나는 꼰대가 되지 말아야지 하는 각오를 매일 하지만 조급한 마음은 김 부장을 꼰대로 만들어 버린다. 동기가 커피 한 잔 하자고 한다. 연락도 잘 안 하던 동기가 갑자기 불러내니 반가운 게 아니라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다. 테이블에 마주 앉은 동기는 지방으로 발령이 났다고 말한다. 사실상 나가달라는 회사의 메시지라고 한다. 너도 얼마 안 남았으니 준비하라고 한다. 김 부장은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나 겉으로는 평온한 척 미소 짓는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린다. 난 진급 누락 없이 여기까지 왔다고 서울에 집도 있다 노후 준비는 끝났다고 그리고 내년에 이사로 승진할지도 모른다고. 자리로 돌아온 김 부장은 더 초조해진다. 주식 계좌를 열어본다. 코로나19로 박살 났던 주식들이 회복해서 오히려 플러스로 돌아섰다. 안심이 된다. 아직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김 부장은 전무의 호출을 받는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전무실로 뛰어 들어간다. 숙제를 가득 받아서 나왔지만 오히려 마음은 편하다. 다른 생각 안 하고 회사 일에만 매진하는 게 김 부장에겐 딱이다. 팀원들에게 업무를 부여하고 본인은 취합하고 이렇게 바쁘게 사는 게 바로 조직생활의 재미 아니겠는가. 일에 열중하다 보니 어느새 퇴근 시간이다. 동기들이 회사를 하나둘씩 떠나고부터 김 부장의 출퇴근길 파트너는 게임이 아니라 유튜브다. 타의로 회사를 떠나는 동기들을 보며 불안한 마음에 재테크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월세도 받고 배당금도 받고 어디 투자도 하고 김 부장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내용들이 심도 있게 나온다. 사실 김 부장은 그런 영상을 보는 게 힘들다. 공부도 많이 해야 하고 직접 발로 뛰어야 하고 절약해야 한다고 강요하기 때문이다. 딱히 절약이라는 것을 해본 적도 없고 절약해야 할 이유도 모르겠다. 어느새 김 부장은 자동차 리뷰 영상을 보고 있다. 뒤이어 골프차 리뷰 영상도 나온다. 그동안 쌓인 데이터 알고리즘이 자연스럽게 그 길로 인도한다. 김 부장은 부장이 되고 나서야 어쩔 수 없이 골프를 시작했다. 전무, 상무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본인의 의지를 어필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김 부장이 성실하고 능력 있으니 임원이 될 거라며 자기만 믿으라고 한다. 필드를 한 번 갔다 오면 비용이 꽤 많이 든다. 전무와 상무를 집까지 가서 픽업하고 운동이 끝난 후 모셔다 드리는 서비스까지 마무리하면 기름값만 몇 만 원이 나온다. 김 부장은 임원이 되기 위해 하는 투자라 생각하며 회사 상사들과 골프 치고 밥 먹고 술 마시기를 반복한다. 평일에는 회사 일에 최선을 다하고, 퇴근하면 골프 연습하고, 주말에는 필드에 나간다. 출퇴근할 때 보던 자기 계발, 재테크 유튜브는 자장가로 전락한다. 지하철에서 졸다 보니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친다. 벌떡 일어난 김 부장은 다음 역에서 헐레벌떡 내린다. 김 부장은 급하게 내리다가 몽블랑 가방을 떨어뜨린다. 과장이었을 때 해외 출장 갔다가 면세점에서 산 명품 가방이다. 몽블랑 가방 시계와 명품 넥타이는 김 부장의 자존심이자 나름대로의 멋이다. 대기업 직원이면 이 정도는 걸치고 다녀야 한다는 게 입사 때부터 김 부장이 굳건히 고수하고 있는 원칙이다. 떨어뜨린 가방을 보니 속상하다. 애지중지 아끼며 들고 다니던 가방인데 잔흠집가 나버렸다. 꽤 오래 들고 다니긴 했지. 김 부장은 출근하자마자 커피를 마시며 새로운 가방을 검색해 본다. 옆 팀 최 부장이 들고 다니는 브랜드를 찾아보니 가격이 200만 원이 넘는다. 칫 놀란 김 부장은 자신보다 잘난 게 없어 보이는 최 부장을 다시 본다. 어떻게 200만 원이 넘는 가방을 들고 다니지? 생각해 보면 김 부장의 몽블랑 가방도 면세점에서 1200달러, 그러니까 150만 원 정도에 구입한 가방인데 면세점에서 산 데다 쿠폰에 카드사 할인에 할부까지 해서 굉장히 저렴하게 샀다는 기억만 있다. 최 부장 가방의 가격을 알고 난 뒤 김 부장은 온종일 가방 생각뿐이다. 책상 아래 놓인 자신의 낡은 가방이 거슬린다. 거래처 사람들이 이 가방을 보면 날 무시할 텐데 팀장이 이런 가방 들고 다니면 팀원들이 날 무시할 텐데 와이프도 내가 이런 가방 들고 다니는 걸 보면 속상해하지 않을까 그래 이 가방은 아들 주고 나는 새 가방을 사는 거야.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외근 간다고 하고는 롯데 에비뉴엘로 향한다. 화려하고 다양한 브랜드들이 많다. 최 부장의 가방 브랜드를 찾아서 매장에 들어간다. 자주 와본 것처럼 행동하려 한다. 가격표를 봐도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 최 부장과 똑같은 것은 없고 비슷한 스타일이 있어 직원에게 보여달라고 한다. 이리저리 뒤적이며 보는 척하다가 가격을 물어보니 300만 원이라고 한다. 200만 원짜리는 없냐고 물어보고 싶다. 하지만 김 부장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대기업 부장이 이 정도로 흔들리지 말자고 마음속으로 되새긴다. 아니 스스로 되새기는 게 아니라 자동으로 새겨진다. 너무나 익숙하다. 이걸로 할게요. 이왕 사는 거 최 부장보다 더 좋은 걸로 사자며 그냥 지른다. 할부 몇 개월로 할까요? 직원이 묻는다. 일시불이요 김 부장 사전에 할 불안 없다. 자존심이다. 내가 이 매장을 나가는 순간까지 나는 멋있는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 내가 이 매장을 나가면 여기 직원들은 나를 완전 다른 눈으로 보겠지. 멋있는 사람이라고 수군거리겠지. 김 부장은 매장을 나와 스타벅스로 간다. 김 부장 사전에 빽다방이나 이디야는 없다. 대기업 부장의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스타벅스 정도는 가줘야 한다. 북적북적한 사람들을 피해 매장 구석에 앉은 김 부장은 새로 산 가방의 포장을 푼다. 브랜드 로고가 크게 찍힌 종이백을 든 채 사무실에 들어갈 수는 없다. 번쩍거리는 새 가방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바라보면서 스타벅스 말차라테의 달달함에 취해본다. 이게 바로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것인가라며 위안을 한다. 그때 김 부장 눈에 왼쪽 손목에 찬 시계가 들어온다. 소매를 살짝 걷어서 가방 옆으로 왼손을 슬쩍 옮겨본다. 새로 산 가방과 같이 있으니 유난히 더 빛이 나는 것 같다. 오늘의 말차 라테는 더 달달하다. 사무실로 복귀해 다시 업무를 시작하는데 너무 기분이 좋다. 커피잔을 들고 어슬렁거리며 다른 부장, 차장, 과장들 사이를 슬쩍 쳐다본다. 자신보다 좋은 가방을 든 사람은 없다. 퇴근하려는데 가방이 두 개다. 둘 다 들고 가자니 폼이 안 난다. 창고에 가서 쇼핑백을 꺼내 예전 가방을 집어넣으려는데 아무래도 퇴근길에 새로 산 가방이 긁힐 것 같다. 잠시 고민하다 새로 산 가방을 쇼핑백에 담는다. 퇴근하는 내내 쇼핑백 안에서 번쩍거리는 가방을 보니 부자가 된 기분이다. 지하철 맞은편에 새 가방 브랜드와 같은 로고가 찍힌 핸드백을 든 아가씨가 앉아 있다. 왠지 반갑다. 김 부장은 시대에 뒤처지지 않았다는 생각에 흐뭇하다. 퇴근해서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트니 집값이 많이 올랐다는 뉴스가 나온다. 김 부장도 본인 집 시세를 확인해 본다. 호가를 보니 작년보다 무려 3억이 올랐다. 10년 전에 산 아파트 값이 두 배가 되어 있다. 갑자기 가방을 살까 말까 고민한 순간들이 떠오른다. 집값이 몇 억이 올랐는데 이까지 300만 원짜리 가방에 졸았던 게 우습다. 김 부장은 스스로 본인 타이틀을 더 길게 만들었다. 부동산 투자도 잘하는 대기업 부장이라고. 얼마 후 김 부장 부인이 모임에서 돌아온다. 저녁은 먹었는지 물어본다. 김 부장은 밥을 안 먹었어도 가방 생각에 배가 부르다. 아내의 모습을 가만히 살펴보니 부동산 투자도 잘하는 대기업 부장 부인답지 않게 수수해 보인다. 핸드백이라고는 김 부장이 몇 년 전 미국 출장 가서 아웃렛에서 사 온 코치 가방이 전부다. 이번 주말에 백화점에 가자고 말해본다. 아내는 말만이라도 고맙다며 필요 없다고 한다. 장이나 보러 가자고 한다. 김 부장은 아내에게 우리 집이 샀던 가격에 비해 두 배나 올랐다고 말한다. 아내가 안 그래도 모임에서 절반은 부동산 이야기만 했다고 한다. 집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 본인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고 한다. 아내는 10년 전 상황을 정확히 기억하고 말해준다. 김 부장은 그때 집값에 거품이 끼었다며 일본처럼 폭락할 거라고 주장했다. 아내는 아이들 교육 문제도 있고, 매번 이사 다니기 힘들다며 집을 사서 한 곳에 정착하자고 했다. 당시 과장이었던 김 부장은 자신의 인생에 대출은 있어서는 안 될 금기 사항이고, 집값이 내리면 책임져 줄 사람이 없다며 완강히 반대했다. 아내는 김 부장이 주장을 굽히지 않자 부동산 중개소에 혼자 가서 계약을 하고 주택담보대출을 일부 받아 매수를 했다. 아내가 김 부장에게 그때 안 샀으면 평생 못 살 뻔했다고 말한다. 김 부장은 그때 기억이 떠올랐는지 아무 말도 못 하고 텔레비전의 시선을 고정한다. 아내는 당신이 열심히 일해서 모은 돈에 대출을 보태 산 거니 당신 덕분이야 라며 김 부장의 길을 살려준다. 다음 날, 김 부장은 출근길에 늘 듣는 윤도현 밴드의 노래를 들으며 생각에 잠긴다. 돌이켜 보니 결정적인 순간에는 본인보다 아내가 더 과감했던 것 같다. 최종 단계에서 망설일 때마다 아내가 확신을 가지고 이를 밀어붙였다. 회사에 도착해서 보니 아차 새로 산 가방을 들고 오는 것을 깜빡했다. 누가 스크래치 난 가방을 볼까 봐 뒤집어서 책상 밑에 눕혀 놓는다. 커피를 마시며 뉴스를 보는데 부동산 가격이 치솟고 있다는 기사가 도배되어 있다. 어제 산 명품 가방에다 몇 억 오른 집값까지. 김 부장은 기분이 날아오를 것만 같아 팀원인 송 과장이 오후 반차를 쓰겠다고 한다. 김 부장은 남의 사생활이 늘 궁금하다. 팀원들 휴가에 이유를 묻지 말자고 다짐했으나 결국 또 물어보고 만다. 송 과장은 오후에 부동산 계약이 있다고 대답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참 당돌하다. 자기 때는 감히 이런 이유로 휴가를 쓸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다. 집 계약 김 부장은 송 과장에게 부동산은 자기한테 물어보고 계약하라며 탕비실로 끌고 간다. 내가 산 아파트가 지금 두 배가 됐어. 궁한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 다 알려줄게. 나중에 집값 떨어지면 어떡하려고 그래 송 과장은 좋은 말씀 주셔서 감사하다며 지금 사도 괜찮은 가격의 매물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왠지 모르게 여유가 있어 보인다. 아내가 과거에 집을 계약했다고 통보했던 날,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다음날 회사에서도 벌벌 떨리는 손으로 커피를 마신 기억이 난다. 수억 원 대출이 주는 압박감 집값이 폭락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처음 계약하는 부동산이라는 큰 짐이 김 부장의 목을 조이는 것 같던 그때 그 느낌이 생생하다. 그래도 15년은 더 살았고 집값 두 배 신화를 쓴 김 부장 자존심이 어디에 얼마의 어떤 물건인지는 차마 묻지 못한다. 지나가면서 송 과장이 전화 통화를 하거나 동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부동산이 화제인 적이 꽤 많았다. 옆 팀 최 부장도 최근에 살던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 갈 준비를 할 때 송 과장이랑 한참 대화하는 것을 봤다. 김 부장은 설마 내가 저 어린애보다 세상 물정을 모르겠느냐며 스스로를 치켜세운다. 설탕이 가득 들어간 믹스커피를 마시며 팀원들을 쓱 둘러보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커피가 쓰다. 상무님 비서가 김 부장을 찾는다. 상무님 방으로 오라는 메시지다. 예전 같으면 아무 생각 없이 곧바로 뛰어갔을 테지만 최근에 지방으로 발령이 나거나 명예퇴직한 동기들이 생각나 몸이 느릿하게 움직인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문을 연다. 근엄한 표정의 상무와 눈이 마주친다. 다행히 골프 얘기다. 다음 주 주말 골프 예약 잡고 멤버 구성하라는 지시를 받고 나온다. 김 부장은 또 한 번 생각한다. 상무와 전무 라인만 잘 타면 승승장구하겠구나. 자리로 돌아와 식은 커피를 버리고 새 믹스 커피를 탄다. 자리에 앉아 주식 앱을 열어본다. 코로나 때 팔까 말까 했던 주식들이 전부 플러스 가슴이 뜨겁다. 역시 나야. 김 부장은 스스로에게 타이틀을 붙인다. 주식 투자도 잘하고 부동산 투자도 잘하는 대기업 부장이라고. 아까는 그다지 달지 않았던 믹스커피의 달달함이 온몸에 퍼진다. 김 부장은 골프 연습장에 간다. 평일에 국경일이 하루 끼어 있는 날이다. 그동안은 바빠서 계속 나가지를 못했다. 도착해 보니 동료 최부장이 있다. 김 부장은 최 부장이 이 근처에 사는지 몰랐다. 회사에서 그다지 말할 기회가 없었던 최 부장과 차 한 잔을 한다. 골프채가 골프공을 때리는 소리가 경쾌하다. 사실 김 부장은 최 부장의 가방이 궁금하다. 본인이 그 브랜드를 알고 산 건지 선물 받은 건지 그런 남의 사생활이 궁금하다. 입사 때부터 꾀죄죄하게 하고 다니던 최 부장이 어떻게 그런 고가의 가방을 들고 다니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다. 회사와 관련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크게 정보 값은 없는 이야기들이다. 무심코 다음 주말에 상무와 다른 임원들과 함께 필드에 나간다고 말하려다 멈칫한다. 최 부장이 내 자리를 치고 들어올까 신경이 쓰인다. 이런 경쟁심은 입사 초기부터 있었다. 최 부장 가방 멋있던데 언제 산 거야? 대화 주제를 가방으로 돌린다. 진짜 하고 싶었던 대화다. 딸이 취직했을 때 마침 내가 부장으로 진급했거든. 그때 기념으로 딸이 사준 거야. 그럼 그렇지. 최 부장이 그런 명품 브랜드를 스스로 알고 구매했을 리가 없다. 역설적으로 김 부장은 그 브랜드를 최 부장 때문에 알게 된 사실을 잊고 있다. 그런데 이 동네 사는지 몰랐네 김 부장이 묻는다. 원래 살던 곳이 회사랑 멀고 분위기도 좀 그래서 바로 옆 동네로 이사했어. 이쪽 지역은 원래 알던 곳이야. 그건 아니고 몇 군데 후보를 봐뒀는데 자네 팀 송 과장이 추천해 줘서 결정했어. 김 부장은 생각한다. 송 과장한테 부동산 전문가인 나를 두고 송 과장한테 물어봐 그것도 후배한테 물어봐. 자존심도 없나? 김 부장은 혹시 바로 옆 동네라면 재개발 끝나고 몇 천 세대 들어왔다는 거기라고 물어보려다가 그게 사실이면 너무 배가 아플 것 같아 묻지 않는다. 그 단지는 커뮤니티와 조경시설이 잘 되어 있고 이 지역 대장주라고 뉴스에서도 몇 번 나왔기 때문이다. 설마 거기는 아니겠지? 내가 살고 있는 집보다는 싼 집이겠지 김 부장은 애써 아닐 거라 생각하지만 내심 불안하다. 최 부장이 연습 끝났다며 낡은 골프 가방을 들고나간다. 김 부장은 최 부장이 혹시나 차를 바꿨을까 봐 주차장까지 배웅하는 척한다. 다행히 최부장의 차는 대리 때부터 타던 15년도 넘은 오래된 차다. 그래도 관리를 잘해서인지 멀끔하다. 팔 힘으로 트렁크를 쾅쾅 열고 닫는 최 부장의 모습을 보며 전동 트렁크를 쓰는 자신이 더 급이 높다고 생각한다. 김 부장은 작년에 바꾼 자신의 그랜저를 쓱 쳐다본다. 저쪽 주차 칸에서 빛이 나는 것 같다.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다시 돌아온 김 부장의 타석에는 타이틀리스트 골프백과 혼마 골프채가 기다리고 있다. 오늘따라 공이 참 잘 맞는다. 집으로 왔다. 오랜만에 평일에 집에 있으니 아들과 식사를 한 번 하고 싶다. 그동안 야근하고 골프 연습장 다니느라 아들 얼굴도 못 본 지 오래됐다. 아들은 대학교 4학년이다. 언제부터인지 자기 방에다가 택배용 박스를 잔뜩 쌓아두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았다. 김 부장이 묻는다. 아들 저거 무슨 박스야? 요즘 이것저것 팔아보고 있어요. 인터넷으로요. 창고가 없어서 물건을 방에 두고 있어요. 아들은 오랜만에 보여주는 김 부장의 관심에 적극적으로 대답한다. 용돈 벌이로 하는 거야 전에 아르바이트도 하는 것 같던데 알바는 너무 돈이 안 되고 공부할 시간도 부족해서 제가 직접 물건 떼다가 팔고 있어요. 어쩐지 김 부장은 못마땅하다. 그렇구나. 취직 준비는 잘 돼가니? 사실 취업 시장이 생각보다 어려워서 그래도 하긴 하고 있어요. 그래 이 아빠처럼 대기업에 꼭 입사해야지. 그런데 아빠 저도 취직하고 싶긴 하지만 요즘 취업 시장이 너무 좁아서요 취업은 항상 힘들어. 회사에서 아무나 쓰려고 하지 않지. 너 같으면 아무나 막 뽑겠니? 살짝 치미는 화를 누르며 대답한다. 아빠 저 실은 지금 하고 있는 이런 온라인 유통 같은 거 해보고 싶은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들의 예상치 못한 대답에 김 부장은 그만 목소리가 높아진다. 뭐? 너 지금 대학 나와서 장사를 하겠다는 말이야? 그게 아니고요. 생각보다 지금 하는 일이 벌이가 괜찮아서요. 재밌기도 하고요. 그럼 대학을 왜 나왔어? 대학 나와서 하겠다는 게 고작 장사야? 내가 너 대학 보내려고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중학교 때부터 과외 학원비 대학교 등록금에 그게 다 얼만데 이까지 장사나 하라고 공부시킨 줄 알아? 이런 건 아무나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거야? 그건 알겠는데요 취직도 좋지만 저한테 맞는 일을 한번 해보고 싶어서요. 대기업을 다녀보지도 않고 맞는지 안 맞는지 어떻게 알아? 이 아빠를 봐. 네가 이 아빠 때문에 어디 가서 꿇린 적 없잖아. 저기 방에 있는 박스 다 갖다 버려. 네 알겠어요. 죄송해요. 뭐 때문에 장사를 하겠다는 거야? 아빠가 계속 돈 벌어다 주잖아. 넌 돈 걱정하지 말고 취직 준비하던 거나 계속해. 김 부장은 피가 거꾸로 솟는다. 서울 중위권 대학을 나온 아들은 대기업에 취직해서 연수도 받고 비슷한 조건에 직장 동료와 결혼해서 아이를 가져야 한다. 이게 당연하다. 김 부장은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아들도 그대로 걸어가기를 바란다. 장사는 김 부장에게 수치스러운 일이다. 친구나 선후배들에게 내 자식이 장사해요라고 말할 용기가 없다. 학교에서 공부 못하고 말썽 부리던 애들이 취업 못하고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일이 장사라고 생각한다. 아침마다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슈트를 입고 구두를 신고 번쩍이는 메탈 시계와 명품 가방을 들고 출근하는 것이 진정한 승자이자 사회의 리더라고 믿는다. 자신 같은 대기업 직원들이 대한민국을 굴리고 먹여 살린다고 믿는다. 김 부장은 불그락 푸르락 얼굴이 굳어진 채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옮긴다. 조용히 지켜보던 아내가 아들 방으로 들어간다. 아들 아빠 말도 맞지만 네 인생은 네가 결정하는 거야. 너는 네가 하고 싶은 거 해. 아빠한테는 엄마가 잘 말해볼게. 기죽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거 계속해. 해보다가 이게 아니다 싶으면 그때 다른 거 하면 되는 거야. 그게 젊음이고 도전이야. 알았어? 네 엄마 고마워요. 그런데 아빠가 저렇게까지 화내실 줄은 몰랐어요. 사실 최근에 장사가 잘 돼서 아빠 선물 하나 샀는데 어떻게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맨날 같은 가방만 들고 다니셔서 가방을 하나 샀거든요. 그래 잘했어. 네가 전에 아르바이트에서 모은 돈으로 샀다고 해. 막상 받으면 아빠도 좋아하실 거야 네 엄마. 김 부장은 걱정이 된다. 아들 녀석이 취직 못하면 어떡하지? 듣도 보도 못한 회사에 들어가면 어떡하지? 동창 애들은 벌써 대기업에 입사했니? 많이 하는데 걔네들한테는 뭐라고 말하지? 설마 진짜 장사를 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손이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김 부장은 스스로의 평가보다는 남의 시선이 더 중요하다. 늘 그래왔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살아왔다. 리모컨을 손에 쥐고 연신 채널을 돌린다. 무언가 집중할 수 있는 자극적인 프로그램이 필요한데 눈에 들어차는 게 없다. 쉽게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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