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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

나는 나답게 살기로 했다., 내가 아닌 나는 없다.

by J____H 2023.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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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운 것이 주는 위안

 


내가 아닌 나는 없다. 전작을 출간하고 독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행사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강연이 아니라 마음이 편안했다. 행사 장소에 가보니 나를 만나러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오신 분도 계셨고, 내가 sns 달아드린 댓글이나 온라인 메신저로 건네 몇 마디 말까지 기억하는 분도 계셨다. 온라인으로 소통해 오던 독자분들을 실제로 만난 그 자리는 내게 무척 소중하고 뜻깊었다. 행사를 잘 마무리하고 그날 촬영을 도와준 친한 형과 뒤풀이 겸 식사를 하러 고깃집에 갔다. 고기를 먹으며 얘기를 나누던 도중에 형이 말했다. 그런데 힘찬아 너 너무 많이 웃더라. 좀 자제해야겠어. 네. 오늘은 딱딱한 분위기가 아니기도 했고 친근한 인상을 주고 싶어서 그랬는데요. 그래도 사람들은 너를 처음 보잖아. 너무 가벼워 보일 수 있어. 사람들은 내게 작가로 분명히 기대하는 모습이 있었을 거라고. 처음에는 형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독자들에게 솔직하게 다가가고 싶었고 그 마음이 통하길 바랐다. 경직된 분위기가 싫어서 유머러스하고 재밌게 이야기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과하게 보였을 줄이야. 곰곰이 생각해 보니 형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를 처음 본 사람은 그런 모습만을 나로 생각할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사람들 앞에서는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 걸까 며칠 동안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반전 매력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에 평소 모습과 다른 면을 보여주면 다른 사람들은 그런 모습이 내 보통 성격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때부터였다. 있는 그대로의 편안한 모습이나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의 솔직한 모습, 평소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들 극단적으로 나를 보여주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를 드러내야겠다고 생각한 시점이 말이다. 글을 써서 사람들과 소통하는 작가 혹은 개인으로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야 할까? 멀티 페르소나는 다중적 자아라는 의미로 상황에 따라 다양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나의 멀티 페르소나는 몇 가지이고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다른 사람들 역시 분명 나처럼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고민이 많을 것이다. 집 안에서는 밝고 당당한 모습이지만 밖에서는 어둡고 주눅 들어 있는 사람, 주변 동료들 앞에서는 에너지가 넘치지만 혼자 있을 때 무기력하고 지쳐 있는 사람들 저마다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우리는 평소에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일일이 신경 쓰지도 않는다. 롤로그에서도 말했다시피 나는 항상 스스로를 주도적이고 능동적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나이를 먹어갈수록 내가 생각보다 수동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에 놀랄 때가 많다. 간단한 예로 나를 좋다고 하는 사람을 거절하지 못해 교재로까지 이어지는 일이 없지 않았고, 20대 초반까지는 이렇다 할 취미도 없어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만나지도 않았다. 그저 주어진 환경에서 열심히 살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믿어왔는데, 그런 태도는 결코 삶의 질을 높여주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그렇기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고민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내 모습을 한 가지로 규정해 둘 필요도 없다. 어떤 상황에서 나답지 않았다고 자책할 필요도 없다.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 순간, 다소 불편하지만 상황에 맞게 나를 포장하는 순간, 상대에 따라 새로운 나를 보여주는 순간 등 모든 순간에 내 모습 역시 나이기 때문이다. 여러 모습에 나 그것이 모두 나임을 인정하는 일이 나답게 사는 일로 향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나만의 속도로 살아갈 것 식물은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속도대로 자란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잘하는 법을 스스로 터득해 꿋꿋이 성장한다. 영양분이 부족한 땅이나 흙처럼 완벽한 환경이 아닐지라도 춥거나 더운 날씨 등 꼭 맞는 기온이 아닐지라도 주변에 가능한 것들을 모두 모아 싹을 틔우는 원동력을 만들어 냈다. 그래서 바윗돌 사이에서도 싹이 트고 가파른 절벽에서도 꽃이 핀다. 인생이 도무지 풀리지 않는다고 느끼던 때가 있었다. 당시에는 이런 의문에 늘 휩싸여 있었다. 왜 내 손에 쥐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을까? 다른 사람들은 항상 나보다 여유롭고 풍족해 보였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닌데도 혼자 비교하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스스로를 괴롭게 했다. 확대해석 피해망상 모든 사람이 미웠고 어떤 일도 하기 싫었다. 경쟁에서 뒤처진 것 같아 숨고 싶기만 했다. 그저 힘없이 할 수 있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야. 비참했던 시절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면서 습관처럼 버릇처럼 그 말에 기댔다. 그저 그 말을 붙잡고 버텨냈다. 돌아보니 그 말이 나를 살렸다. 그래서 잘 된 사람들이 힘든 시기에는 그저 버티라고 오래 살아본 어르신들이 그리도 악착같이 버티라고 조언했나 싶다. 할아버지가 들려준 말씀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자연의 순리에 맡기라는 말 주어진 운명대로 살아가라는 말로 들렸다. 주변에서 자라나는 식물, 특히 삭막한 환경에서도 피어난 꽃을 떠올려보자.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하나리라는 시에도 그런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 다. 저 안에 태평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우리도 마찬가지다. 저마다 다른 삶의 어떤 시기에 태풍도 맞고 천둥도 맞고 벼락도 맞아가며 대추가 붉어지듯 찬찬히 성숙해 간다. 우리 삶에 주어지는 경험들은 역경을 딛고 반드시 결과물을 맺는다. 팍팍하고 메마른 바위틈에서도 어떻게든 싹이 트는 것처럼 나 또한 주어진 환경에서 솟아오를 수 있으리라 믿어보자.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겪어야 할 태풍, 천둥, 벼락과 같은 시간 때문에 제자리걸음을 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걷다 보면 분명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삶의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



힘들었던 시절 내게 가장 큰 위안이었던 건 식물처럼 인간도 삶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성공과 실패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먼 미래라고 생각했던 것이 어쩌면 가까이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숙해지는 사람을 보면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사연들이 숨어있다. 그것이 성장의 이유다. 그러니 오늘 나만의 속도로 한 걸음씩 나아가자. 내가 걸어온 발자취만이 나에 대해 말해주는 증거니까. 고요할수록 밝게 빛나다 회사를 그만둬야 할지 계속 다녀야 할지 고민입니다. 더 배우고 경험해 능력을 키우고 싶은데 이 일이 내게 맞는 거지 확실히 들지 않아요. 무슨 일을 하더라도 최선을 다했어요. 사람들에게 그저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이 단순한 사실을 알기까지 오래 걸렸고 알고 나니 이제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꼭 길 잃은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에요. 전문가도 아닌 내게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고민의 종류는 다양하다. 너무 외롭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없는 것 같다. 살아갈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정답은 다 다르겠지만 개개인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라는 사실만은 공통적이다. 우리는 좋든 싫든 크고 작은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 개인이다. 그러므로 인간관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요즘 시대에는 배가 고파서 힘들다는 사람은 보기 어려워도 친구가 없어서 힘들다는 사람은 쉽게 볼 수 있다. 연인과 헤어져 죽을 것 같이 슬프다고 하는 이들도 많다. 이렇듯 관계에서 오는 상실감과 공허감은 시대가 바뀌면서 점점 더 사회 문제가 되어가는 중이다. 먹고사는 일에만 몰두해 대인관계의 허무함을 채우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침울해지고 피폐해져 간다. 그러한 허전함 때문일까 우리는 휴대전화나 태블릿을 손에서 놓지 않은 채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삶을 엿보고 내 삶을 전시한다. 일정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혼자 있는 시간에도 타인과 연결되어 있는 끈을 놓지 않는 셈이다. 외로움이나 고립감을 달래 질지 모르지만 그 탓에 피로가 사라질 틈이 없고, 소위 말하는 감정 소모에서 벗어나기도 힘들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인간관계에 집착하지 않고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 그런 시간을 확보해야 비로소 진짜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대면하고 이를 치유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면 고독을 즐길 수 있게 된다. 나를 더 깊게 읽는 시간, 어지러운 마음을 정돈하는 시간이다. 혼자 지내는 것이 꼭 부정적인 감정과 쓸쓸함을 동반하지는 않는다. 혼자 느긋하게 산책하거나 책을 읽는 등 밀어두었던 여가를 즐기면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그리고 그렇게 혼자의 시간이 충만해야 타인과의 관계 맺기도 바람직하게 이루어진다. 혼자 있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연습을 하면 좋다. 뭘 하든 시간을 낭비한다는 죄책감을 갖지만 않으면 된다. 해보는 거다. 관계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지만 통제는 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영어 단어 중에 노리는 쓸쓸한 외로움을 나타내지만 언론은 단독으로, 혼자의 힘으로라는 의미를 지닌다. 같은 혼자라는 그 뜻이 다른 셈이다. 독립된 시간을 외롭고 쓸쓸한 시간으로만 생각하지 말자. 오히려 내 마음과 내 할 일에 집중해 보자. 내가 좋아하는 문장에도 답이 숨어있다.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 복잡한 세상 속에 혼자 고요히 머무는 시간 이때 빛나는 건 나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면서 새로운 날을 만나기 바란다. 단절됐던 세상과 다시 연결되어라. 누구에게나 아물지 않는 상처가 있다. 가끔 통증이 느껴지더라도 그때만 참고 모른 척 살면 당장은 편하다. 그러나 상처는 더 커지고 깊어진다. 더 늦기 전에 암을 수 있게 치료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과거를 애도해야 하는 이유다. 인간은 약하디 약한 존재라 작은 상처에도 무방비하게 무너지지만 어떤 순간은 놀란 만큼 강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상처를 헤집는 고통을 견디고 자신을 되찾는 일은 세상을 버티는 든든한 경험으로 남을 것이다.

 

딛고 일어서라.



트라우마에 관한 연구로 유명한 하버드 대학 정신과 교수인 주디스 어머는 트라우마를 딛고 일어서는 세 단계의 과정이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 단계는 스스로에게 안전한 환경을 제공해 안정감을 느끼는 것이다. 내 경우에는 집에 아무도 없을 때 가장 안심한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10대 때에는 엄마와 마주치기 싫어 저녁 무렵까지 밖에서 시간을 보냈고, 집에서는 게임을 하면서 현실을 외면했다. 정서적 안정을 취할 곳이 간절했지만 그런 곳을 찾기가 불가능했다. 스무 살이 됐을 때 집에서 독립해 얻은 첫 어둠은 내게 정말 집이라 부를 만큼 아늑한 공간이자 환경이 되어 주었다. 아무리 힘들고 고단한 하루를 보냈어도 집에 돌아와 씻고 잠자리에 누우면 편안함을 느꼈다. 비로소 내 자리를 찾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아늑하고 안전한 공간에서 마음의 상처도 조금씩 아물었다. 두 번째 단계는 트라우마가 된 사건을 기억하고 자신이 경험한 상실을 슬퍼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일이다. 주리스는 2단계에서 이야기하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야기하기란 자신이 겪은 트라우마를 이야기로 엮어서 말하는 것을 뜻한다.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상황에 어떤 관점이 생기는 걸 뜻한다. 상황을 분석하면 그 일이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재해석하는 작업을 시작할 수 있다. 나 역시 과거의 기억을 재해색하려 시도했다. 20대 초반 첫 단독 에세이를 출간하기 전에 다른 여러 작가들과 함께 지필에 책을 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처음 내 얘기를 글로 덤덤하게 풀었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정말 많은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이 과정에서 상처 많은 과거의 날을 발견했고, 그 이야기를 글로 써 내려가면서 많이 울었다. 트라우마의 말을 거는 일은 몹시 괴롭고 힘들었다. 물론 활자로 자신의 이야기를 적다 보면 잘 드러나지 않고 긴 시간 이어져 온 일들을 한꺼번에 인지할 수 있다. 하지만 힘든 건 힘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를 하다가 힘들면 잠시 중단해도 된다 도망쳐도 된다 다시 돌아온다는 약속만 한다면 말이다. 실제라 믿었던 기억이 왜곡과 모순으로 이루어졌음을 깨닫기도 한다. 나는 살면서 내 존재를 제대로 인정받은 적이 없다고 줄곧 믿어왔다. 하지만 이야기하기 과정을 거치면서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은 성격 차이를 이유로 이혼했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서 어머니는 나를 돌볼 틈도 없이 일을 하러 다녀야 했고, 나는 혼자 있거나 보육원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며 자랐다.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아야 할 나이에 나는 밤마다 혼자서 잠을 청하며 공허함, 외로움에 익숙해졌다. 어머니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애써 장난을 치고 밝은 척했지만, 어머니는 생기에 대한 압박과 스트레스 때문에 내 감정을 살피지 못했다. 그런 탓에 어머니와의 사이가 자연스럽게 멀어졌고, 날이 갈수록 서운함이 커져 스스로 어머니와 거리를 두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친구들에게 나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서 노력하면서 사소한 것을 쉽게 서운해하고 작은 일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기도 했다. 또 감정적인 성격 탓에 눈물도 많았다. 사람들에게 마음을 여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곧 좋은 친구들이 생겼고, 그들과의 우정에서 나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정체성을 만들어 갔다. 친구들 사이에서 내 존재를 인정받은 경험은 내가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당시에 미처 전하지 못한 고마움을 성인이 된 후에 글로 적어 전했다.

 

감사는 과거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강화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다시 말해 좋은 일에 대한 기억을 자주 떠올리게 하며 그 당시에 긍정적인 정서를 되살려준다. 이는 긍정심리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미국의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이 제시하는, 나를 진정한 행복으로 이끌어주는 하나의 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은 경험이 있다면 반대로 내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준 사람을 떠올려보면 좋다. 좋은 친구들 덕분에 표정이 밝아졌고 다시 사람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지금의 나는 여전히 느긋한 성격이지만 속은 자신감으로 꽉 차 있다. 행복한 경험은 떠올리기 좋은 추억으로 남는 것을 넘어 현재의 내 정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가령 힘든 순간을 마주하더라도 괜찮아 내일부터 다시 시작해 보자.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잖아. 하면서 자신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단계는 세상과 연결되는 것이다. 나는 상처였던 과거들과 이를 마주하는 과정을 글로 드러냈다. 내가 처음에 세상에 공개한 글은 아이러니하게도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깊은 속마음이었다. 너무 솔직한 글이라 그 글을 접한 이들이 어떻게 그렇게까지 전부 털어놓을 수 있냐고 묻기까지 했다. 편부모라는 가정 안경, 지독한 가난, 한국에 와서 겪은 차별과 사춘기 시절에 들었던 폭언들 이때의 상처는 앞서 마주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기억하고 대화하면서 해소했다. 그리고 콘텐츠로 제작해 세상에 내보였다. 사람들의 반응이 우려스러웠으나 괜한 걱정이었다. 선택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차별을 겪었다니 힘드셨겠어요 한일 양국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는 경계인으로 고생이 많았겠지만 추성훈 선수나 손정훈 소프트뱅크 회장과 같이 당당히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독일에 사는 15세대 교포라 공감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작가는 글을 읽고 저도 정면 돌파를 다짐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와 같은 대부분의 격려와 응원, 공감과 지지를 보내주었다. 글을 써서 내 이야기를 세상에 꺼내놓은 것 그로 인해 대중과 처음으로 진솔한 이야기로 소통한 곳은 스스로에게 값진 경험이 됐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로막혀 있던 사고의 회로에 한 줄기의 빛이 들어왔다. 그 빛은 내가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었고, 삶을 스스로 주관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도록 도와주었다. 그 신념은 오늘날의 내가 존재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어떤 관점을 가지려면 약간의 거리가 필요하다. 두려움 없이 그 상황을 몸이 건조하게 바라볼 수 있는 내실을 다지면 마음의 여유는 자연스럽게 확보된다. 비록 상처 투성이가 되어 도망치는 한이 있어도 결국 돌아오는 것처럼 관계를 내려놓는 한이 있더라도 회복할 기회는 온다. 그 믿음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배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 당신의 그 상처가 관계를 형성하는데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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