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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

세이노의 가르침, 피보다 진하게 살아라

by J____H 2023.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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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느껴질 때


우리 아버지는 북한이 고향인 의사로서 6.25 때 남아하셨다. 
1960년대 국민학교 시절까지는 비교적 잘 살았던 것 같으나, 의사라는 직업을 부자가 되는 도구로는 사용하지 않으셨던 아버지였기에 절대로 부자는 아니었다. 그나마 국민학교 시절, 이미 아버지가 엄청난 사기를 당하면서 집안은 재판에 휘말렸고, 붉은색 차압딱지가 은수저에까지 세 번 붙더니 중3 때는 말 그대로 길거리로 내몰렸는데, 가재도구라고는 손수레 하나도 되지 않았다. 우리 집은 그렇게 몰락했고, 환갑이 다 된 아버지에게서 나는 처음으로 눈물과 한숨을 보았다. 왕진 가방마저 압류당했던 연로한 아버지는 약간의 정치적 연줄을 가지고 있던 덕분에 무의촌 보건소장이 되었지만, 결국 월세방 한 칸과 빛만을 남긴 채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어린 시절 그 파산의 영향으로 나는 현금 20억을 모을 때까지 돈을 거의 쓰지 않았는데, 그 어떠한 일이 닥치더라도 비를 피할 수 있는 튼튼한 우산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저 돈만 쫓아다녔다. 사람들을 만나면 그저 내 호주머니를 불려줄 수단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잘못이었다. 나부터도 나를 어떠한 수단으로만 여기는 사람에게 물건을 살 마음이 생기지 않으니까 말이다. 돈을 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호주머니 속에 있는 돈이 그 사람의 자발적인 의사로 내 호주머니로 옮겨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고객의 불편함을 파악하고 진심으로 섬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양반 정신을 버리고 머슴의 정신을 가지면 된다. 사람들이 돈을 벌지 못하는 이유는 그러한 머슴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철저한 신용을 다져나가고 약속을 철저히 이행했다. 강의용 음향기기 설치 사업을 시작했을 때, 사업 시작 첫해에 수해가 났다.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천재지변 때문에 일어난 일이므로 책임이 면제된다고 주장했겠지만, 나는 무료로 모두 수리해 주거나 신품으로 교체해 주었다. 몇천만 원의 손해가 생겼지만, 바로 그 고객들이 모두 나의 영업사원처럼 선전을 해준 덕분에 1년 뒤에는 수억을 벌 수 있었다. 아울러 나는 경쟁이 치열한 곳에는 전혀 가려고 하지 않았다. 이른바 멋지고 폼나는 분야에서는 똑똑한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함께 경쟁하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은 언제나 패자가 되고 만다. 그러나 경쟁이 약한 분야에 가게 되면 그저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들어오는 경우가 많으므로, 그들보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이길 수 있었다. 나는 남들이 잘 모르거나 불편해하는 것을 해주고 대가를 받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 열중했다. 그런 것들이 돈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모든 사업은 3년이 고비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어떠한 일에 3년만 미친 듯 몰두하면, 그 후에는 내가 크게 몰두하지 않아도 돈이 들어오는 시스템의 뼈대가 완성된다. 나는 어떤 일을 시작하든 배수진을 치고 죽기 살기로 덤벼드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마음 가짐으로 임하지 않기 때문에 실패하고 만다. 


실패하면 제로점으로 내려가라


어째서 큰 부자들은 대부분 하나같이 가난했던 과거를 가지고 있을까? 어째서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태어나 부자가 된 사람들보다 하류층에서 태어나 큰 부자가 된 사람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걸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중요한 사실은 가난을 일찍 경험한 사람들은 가난했던 생활 수준이 출발점이었기에 상대적으로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부끄럽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일이 잘못되어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날리는 실패를 겪더라도 제로점으로 돌아가 재출발하는 것을 덜 어렵게 여긴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말 이전까지는 비교적 넉넉한 환경에서 살았으나, 그 이후에는 허름한 적산가옥에 2층 단칸방에서 일곱 명의 가족이 함께 살았다. 그다음에 서울역 앞, 양동의 쪽방 등 몇몇 곳을 전전하게 되지만, 가정집, 차고에서도 살았었다. 나는 몇 년을 그런 곳에서 혼자 살아가며, 주거 환경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그저 보유자금을 불리는 데에만 관심을 두었다. 당시에 나는 주로 번역일에서 수입을 얻었는데, 번역 사무실 한 귀퉁이에서 숙식을 하며 생활했다. 부자로 살고 있는 지금도 내가 만에 하나 어떠한 잘못 때문에 재산을 모두 날리게 되어 빈털터리가 된다고 해도, 즉시 나는 가족을 이끌고 제로점으로 내려갈 것이다. 그곳은 판잣집일 수도 있고, 남의 집 차고일 수도 있으며, 쓰러져 가는 무허가 비닐하우스일 수도 있다. 결혼 전 나는 아내에게 틀림없이 내가 부자로 산다고 말했다. 돈의 생리와 부자가 되는 비결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내는 당시 내가 아파트 한 채 값인 3천만 원 정도의 빚이 있었기에 그 말을 믿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둘째 딸이 태어났을 때 이미 안정적인 재산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비결 중 하나는 바로 낮은 곳에서 살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내에게 아이들이 중학생쯤이 되면 아빠가 망했다고 거짓으로 재산을 몽땅 차압당하는 연극을 꾸미는 게 어떻겠냐고 했지만, 아내의 반대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그 대신 딸들에게 이 세상에서 대가를 얻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은 곳에서의 삶을 체험해야 나중에 경제적 문제에 부딪혔을 때 더 지혜롭게 헤쳐나갈 수 있다고 나는 지금도 믿고 있다. 비교적 안정된 환경에 익숙한 사람들은 실직이나 투자 실패 등으로 인한 경제적 곤란을 겪게 되면 대부분 빚을 내려고 한다. 그러면서 그들이 살았던 생활 수준보다 현저히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을 어려워한다. 내 주변에 9천만 원의 전세를 살면서 빚은 1억 원을 지고 있는 30대 중반의 사람이 있었다. 그는 연봉 2천만 원대의 봉급 생활자였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진퇴양난으로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권유한 방법은 있는 것을 모두 처분해서 빚부터 정리하고 월세방 하나로 옮기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런 집에서 어떻게 아이들과 살아가냐고 항변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은 지금 연봉의 절반 이상을 대출 이자로 지불하고 있으니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평생 빚에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말했다. 생활비를 극도로 줄이고 자신의 몸값을 비싸게 만들 방법을 모색하면서, 아내의 도움을 받아 밤에 투잡이라도 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왜 재산을 가지고 이민을 간 사람들보다 빈털터리로 이민을 간 사람들이 성공하는 경우가 많은지 않은가 밑바닥에서 잃을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아무 일이나 하면서, 그곳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는 아주 낮은 생활 수준으로 살아가며 돈을 모았기 때문이다. 제로점에서 살게 되면 모든 것이 플러스로 쌓여간다. 돈과 희망이 쌓인다. 빚이 있는데도 삶의 질과 품위 유지를 내려놓지 못한다면 오랜 시간 불안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삶을 내려놓으면 빨리 빚을 청산하게 되고, 그 시간을 잘 이겨낸 자신이 자랑스러워질 때가 온다.

피보다 진하게 살자


나는 20대 초반, 삶을 비관해서 약을 먹고 며칠 후 깨어난 적도 있고, 손목을 그어 응급실에서 깨어난 적도 있다. 그 덕분에 정부에서 운영하는 정신병원에 강제로 보내지기도 했다. 우울증에 걸렸던 게 아니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우울해진 사건들 중 하나는 제대 후 압구정동에서 일어났다. 우연히 부잣집 여자친구와 압구정동을 지나다가 그녀에게 너는 결혼 후 어떤 곳에서 살고 싶냐고 물었다. 그때 그녀의 대답은 얼마 전 결혼한 막내 언니가 20평대에서 사는데, 좀 좁게 느껴지므로 자신은 30평 정도 되는 곳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나중에 그 동네 아파트 가격을 알아보니, 30평은커녕 가장 작다는 20평대 아파트의 전세조차도 나로서는 평생 가질 수 없는 수준이었다. 남산 꼭대기에서 바라다볼 때, 수없이 널려 있는 그 아파트들 중 단 한 채도 내 것이 된다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해 보였다. 그것이 벌써 근 30년 전의 얘기다. 사람들은 하면 된다고 말하지만 나는 도무지 할 것이 없었다. 제대 후 기술이 있는 곳도 아니고 대학생도 아니었고 홀로 세상에 던져진 가난한 청년에게 하면 된다는 말은 사기처럼 들렸다. 아침 햇살을 가슴 벅차게 안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나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지긋지긋한 가난뿐이었다. 나는 결국 절망과 고독감, 외로움과 열등감, 현실 도피와 삶의 기준 상실, 그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자살을 생각했고, 그 시도가 거듭 실패하자 이왕에 살아야 한다면 내 팔목에서 쏟아진 피보다 더 진하게 살아보자고 결심했다. 그리고 은연중 피보다 진하게 살자가 내 좌우명처럼 자리 잡았다. 나는 경제적으로 실패했다면 저 아래에 낮은 곳으로 내려가라고 말한다. 체면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그 체면 따위는 떨쳐버리고 출발점으로 돌아가라. 그러면 돈이 쌓이게 된다. 이것이 실패로부터 탈출하는 비결이다. 스물세 살의 어느 우울한 봄날이었다. 다시 봄이 왔을 때 나는 남의 집 차고에서 살면서 닥치는 대로 공부했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부터 시작해 미군 부대에 물건 판매 등 여러 가지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28살의 여름날 나는 허름하지만 처음으로 마당까지 있는 집과 자가용을 구입했다. 비록 대출을 받고 구매한 것이었지만 영원히 불가능할 것 같던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일 년 뒤 나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전 재산을 몽땅 날리고 빚까지 졌다. 그리고 다시 일어섰다. 살다 보면 해도 해도 안 될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현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이 쌓이다 보면 자살의 유혹을 느끼기도 한다. 

성공을 향해 나아가려면


눈이 오는 날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그윽한 향기에 원두커피를 마시고 싶다. 바람이 부는 날 나는 깨끗하게 다려진 반듯한 셔츠를 입고 싶다. 비가 오는 날 좋아하는 음악을 마음 놓고 크게 듣고 싶으며, 마음 맞는 사람들과 술 한 잔 기울이고 싶다. 어느 뜨거운 여름날에는 바람이 살랑이는 창문을 열고 하얀 시트가 깔린 침대에 누워 편안히 낮잠을 청하고 싶다. 그곳이 바닷가 해변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매일같이 샤워를 하고, 샤워를 한 뒤에는 시원한 음료 한 잔을 마시고 싶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할 때 버스가 왔다고 같이 뛰어가기보다는 택시를 잡아 편히 집까지 바래다주고 싶다. 손영란 시인은 이러한 내 마음을 별것 아닌 것을 그리워함이라는 시에서 비슷하게 표현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생활의 격이란 별게 아니다. 때맞추어 뜨거운 물에 목욕할 수 있고, 갓 구운 빵을 커피와 함께 먹는 것이며, 아침엔 가끔씩 모차르트를 듣고, 매일 아침 배달된 신문을 읽는 것이다. 버스를 타도 좋으나 어쩌다 한 번씩은 차를 혼자 모는 것이다. 구겨진 옷이 아니라 깨끗이 다린 옷을 입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은 음식을 시켜 먹을 수 있어야 하며, 가끔은 집안이 환해지도록 꽃을 사는 것이다. 나는 정말 별 것 아닌 것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그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실제로 행하는 것이 만만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행복은 우리가 소유한 것들이 유형이든 무형의 것이든 그 양과 질이 증가하는 과정이 계속될 때 얻어진다. 미국의 심리학자 데이비드 마이어스 역시 행복의 추구에서 고정된 고소득보다는 소득이 증가하는 상태가 더 낫다고 말했다. 소득이 많고 적음 자체가 아니라 매년 오르고 있을 때 인간은 더 많은 행복을 느낀다. 나는 그의 말에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사람은 자신의 삶에 스스로 변화를 일으켜 그 어떤 분야에서든 자신의 가치를 증대시켜 나갈 때 행복을 맛볼 수 있다고 말이다. 양귀자의 소설 모순에서 주인공인 25세 여성 안진진의 이모는 삶의 무료함을 느끼는 부유층 사모님이다. 그런데 그 잘 살던 이모가 너무나 행복한 일상에 지쳐 자살하고 만다. 부자였지만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종종 자살을 하는 이유 역시 삶에 변화가 없을 것으로 믿기 때문이며, 나 역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 내 미래에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으로 오판하고 그러한 시도를 했었다. 그러나 로버트 슐러는 절벽에서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조차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떨어지고 있으므로 하늘을 향해 날아볼 수는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떨어지던 중, 비쩍 마른 두 팔로 사력을 다해 세상 속으로 날갯짓을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추락할 때에야 나에게 날개가 있음을 알게 된다는 말을 좋아한다. 추락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러한 날개 짓을 할 줄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절망의 골짜기에는 밑바닥이 없다. 아무리 깊이 떨어져도 우리를 산산조각으로 부서뜨릴 절망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마약 중독자의 일상을 그린 영화 트레인스포팅에서 주인공 마크 랜트는 이렇게 말한다. 삶을 선택하라. 직업을 선택하라. 미래를 선택하고 가족을 선택하라. 빌어먹게 큰 텔레비전을 선택하라. 세탁기와 자동차, CD 플레이어와 전동식 깡통 따기를 골라라. 아이와의 제품을 고르고, 일요일 아침마다 교회에 나가 회개하는 삶을 선택하라. 하지만 내가 왜 그런 것을 원해야 하는가? 렌트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을 비웃는 듯 보이지만, 그의 독백 속에는 평범하게 살래야 살 수도 없지 않느냐는 절망이 깔려있다. 트레인스포팅은 영국에서 기차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온 말로, 사람들이 기차역 플랫폼에 모여 역으로 들어오는 기차의 번호를 맞추는 게임을 뜻한다. 이 영화의 극작가 존 호진은 이런 게임을 하는 사람들, 즉 트레인스포터는 혼돈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 것일 수 있으며, 이것은 영국 젊은이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젊은이들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결국 트랜스포팅은 삶이 우리에게 달려오지만 우리는 삶의 번호를 알지 못하며 다만 번호를 맞추는 게임을 할 뿐이라는 메시지를 남긴다. 우리는 왜 절망하는 것일까? 미래의 상황을 현재 처지에 비추어 미리 계산하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대를 못 다닌다고 해서 십 년 후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금의 빚을 5년 뒤에도 다 갚지 못할 것이라고, 지금의 연봉으로는 평생 남들처럼 여유롭게 살지 못할 것이라고 미리 계산해서 체념한다. 지금 가난함으로 평생 가난하게 살아갈 거라고 미리 계산기를 두드려 미래의 삶에 절망적인 번호를 매기고 만다.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이러저러하므로 5년 뒤, 10년 뒤에도 이러할 것이기에 희망이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 섣부른 계산이다. 부자가 되려면 미래 방정식에 지금의 처지를 대입하면 절대로 안 된다. 결코 그런 짓은 하지 마라. 트랜스포팅 게임처럼 우리에게 달려오는 삶의 번호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옛날 중국 춘추전국 시대에는 논두렁에서 군사를 일으켜 이약 군왕이 된 자가 있는가 하면, 저작거리에서 춤추던 무이가 하루아침에 황후가 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렇게나 절망적이었던 내가 부자로 살아갈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흔히 이야기하듯 사람 팔자는 시간문제다. 그러므로 미래를 미리 속단해서 절망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그저 이 순간부터 당신의 미래의 언젠가에 무슨 일인가가 새로 일어날 수 있도록 책을 읽고 지식을 축적하라. 절대로 내가 지금 이걸 배워서 어디에 써먹겠나라든지, 이렇게 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는 따위의 생각은 하지 마라. 그것 역시 미래 방정식에 현재의 시간을 대입해 계산하고자 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단, 무엇을 배우든, 무엇을 하든 죽음을 생각하는 독한 마음으로 제대로 하라. 이미 그렇게 몇 년째 살아왔음에도 변화가 없다면, 당신은 그저 삶의 번호를 잘못 찍는 바람에 길을 잘못 들었을 뿐이다. 그 잘못된 길에서 절망하지 말고 빨리 깜빡이를 켜고 길을 바꾸어라. 내 말을 믿어라. 거기서 새 삶이 무섭도록 빠르게 달려올 것이다. 정말 그렇게 되느냐고 묻는다면 수많은 사례가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만 얘기해 보겠다. 신문에 칼럼을 기고할 당시 절망감이 가득 찬 독자로부터 메일을 계속해서 받았었다. 이른바 괜찮다는 대학의 인문학과를 졸업했지만 이혼하여 혼자가 된 상태에서 뚜렷한 기술이나 직업도 없는 30대 초반의 독자였다. 그저 막연한 생각으로 약대나 한의대에 다시 가려고 생각했지만 실패했고, 부업 삼아 중고등학생들을 가르치며 모아둔 얼마 안 되는 재산마저 주식으로 날려버린 상태에서 몰락한 집안을 이끌어가야 할 처지였다. 답변 메일에서 나는 부업 삼아하던 과외 일에 미칠 만큼 빠져보기를 원했다. 프로가 되는 법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었고, 그 독자는 내 지시대로 하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는 즉각 내 말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머뭇거리며 나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그의 질문들은 정확히 표현하면 궁금한 점이 아니라 조바심이었고, 내가 이렇게 한다고 해서 과연 세이노의 말처럼 들까 하는 끝없는 의심이었다. 왜 사람들은 내가 이미 실제로 경험한 것들을 말해주는데도 믿지를 못할까? 정말 이러한 의심은 미래를 미리 계산해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가난한 의식을 가진 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승자는 먼저 달리기 시작하면서 계산하지만, 패자는 달리기도 전에 계산부터 하느라 행동하지 못한다. 유대 경전에 나오는 이 말은 말 그대로 진리다. 미래를 미리 계산부터 하려는 그의 태도에 나는 짜증이 났으나, 결국 그는 내가 제시한 방법을 받아들였다. 1년이 지나자 그의 재산은 수천만 원이 되었고, 다시 1년이 채 못 되어 그 금액은 2억이 되었으며, 거기서 다시 6개월쯤 지나자 그가 내게 보고한 금액은 3억에 달했다. 물론 내가 아주 약간의 재테크 조언을 해주기도 했지만, 그는 더 이상 내 조언들을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일과 관련된 공부를 할 때는 피를 토할 자세로 임하라고 말한다. 1981년부터 90년까지 10년간 언론에 게재된 자살보도를 분석한 논문에 따르면, 자살 동기의 가장 큰 원인이 경제적 어려움이며, 그다음이 정서적 갈등, 부부 갈등, 학원 문제 등의 순이었다. 그만큼 돈의 문제는 우리의 목숨과 직결되어 있다. 또 자살의 심리적 원인은 절망과 고독감, 현실의 갈등, 상황 도피 순으로 나타났다. 앞서 말한 30대 초반의 독자에게 프로 과외 선생이 되는 쪽으로 삶의 방향을 전환해 보라고 권하면서 그때 일을 어떻게 하는지 방법론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었다. 학생을 손님으로 여기며 하루 종일 가르치는 것과 관련된 일, 즉 교재를 준비하는 것과 가르치는 일에만 미친 듯 몰두하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적어도 2, 3년 정도는 살면서 그러한 혹독한 시기를 보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죽고 싶을 만큼 경제적으로 힘든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자신을 성장시키고 경제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몇 년의 혹독함은 충분히 견딜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할 때 미래는 그 암흑의 빗장을 서서히 열어줄 것이며, 조만간 그 빗장 너머에서 비치는 눈부신 햇살 아래에서 당신은 뜨거운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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