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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

오은영의 화해, 상처받은 내면의 나와 마주하는 용기

by J____H 2023.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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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아파했던 당신들



우리 중 누가 당신이 아닐까요? 해결되지 않은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사연을 상담하는 정신상담 칼럼 오은영의 화해를 연재하면서 정말 많은 아픈 사연들이 제게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굳이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지 않더라도 마음의 병에 눌려 사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참 많았습니다. 그 상담 칼럼은 또한 정말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습니다. 어떤 칼럼은 몇만 명이 읽기도 하고 몇 천 개의 댓글이 달리기도 했어요. 그들은 사연의 주인공을 안타까워하고 위로했어요. 진심 어린 조언을 하고 앞으로의 삶을 응원하기도 했지요. 자신의 이야기를 일부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연의 주인공보다 더 가슴 아파하고 분노하기도 했습니다. 펑펑 울기도 하고 조금은 위로를 받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제 상담 내용에 각자의 의견을 내놓으며 열띤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죠. 문득 우리는 왜 그토록 그 사연들에 관심을 가졌을까 궁금해졌습니다. 따지고 보면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인데 왜 그렇게 절절하게 공감하며 눈물을 흘리고 화를 냈던 걸까요? 가만 생각해 보니 우리 중에는 그 사연의 주인공들이 아닌 사람이 없었습니다. 물론 똑같지는 않아요. 하지만 우리는 저마다 그와 비슷한 크고 작은 마음의 상처들을 가진 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나름대로 힘겹게 버티고 있는 무엇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 사연의 주인공이 나는 아니더라도 내 옆에 내 앞에 내 뒤에 내가 위로해줘야 하고 이해해줘야 하는 소중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을 부모로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어느 순간에는 자식에게 나쁜 말을 한 부모도 있고 어느 순간에는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부모도 있고 어느 순간에는 이기적인 부모도 있었을 겁니다. 자신도 모르게 자식을 비교하고 비난하고 형제간에 차별한 부모도 있었을 겁니다. 자식에게 옳고 그름을 가르쳐주고 보호해 주어야 할 순간에 주저하다 방향을 잃어버린 부모도 있었을 겁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우리네 많은 부모들의 모습이었으니까요. 인간은 완벽할 수 없습니다. 완벽한 부모도 불가능해요. 그런 부모는 어디에도 없어요. 부모는 본능적으로 자식을 사랑하지만 목숨을 바칠 만큼 엄청나게 사랑하지만 그래서 결국은 자식에게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남길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가 봐도 문제가 있다고 할 만한 부모는 물론이고 좋은 부모라는 말을 듣는 부모조차 그럴 거예요. 어느 누구도 부모와의 관계에서 갈등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 갈등의 크기는 조금씩 다르겠죠. 어떤 사람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서 고통에 허우적거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좀 작은 편이라 그럭저럭 처리해 나가면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런 갈등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기에 오은영의 화해 사연들은 크든 작든 모두 우리의 상처, 우리의 이야기였던 겁니다. 칼럼을 쓰면서 우리의 상처의 깊이에 비해 지면이 좁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의 힘겨움의 무게에 비해 조언이나 위로가 너무 짧은 것이 아닐까 항상 마음에 걸렸습니다. 좀 더 속 깊은 이야기를 더 많이 우리와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우리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지만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나이와 상황, 사는 곳, 하는 일은 모두 다르지만 힘들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내일의 삶이 불안하고 오늘의 삶이 버겁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아니 잠시라도 이 많은 우리가 마음의 편안함을 얻을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이 책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상처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지금 우리는 왜 이렇게 아픈지 이 아픔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앞으로 이 고통을 어떻게 다루며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적어보았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서 인생 선배 사회인으로서 친구로서 엄마로서 형제로서 자식으로서 고뇌하고 분석하며 연구해 보았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우리가 우리 자신과 화해하기를 바랍니다. 부모 자식 형제 친구 혹은 주변 사람들과의 화해는 접어두세요. 그들과의 화해는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는 단지 우리가 우리 자신과 화해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던 나, 그런 나를 보잘것없는 존재로 보고 미워했던 나,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나. 그 상처받은 나와 미워했던 내가 화해하기를 바랍니다.

 

상처의 시작은 나 때문이 아니었어요.



그것을 기억하자. 그것을 알고 당신이 당신 자신과 진정으로 화해하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의 상처는 너무 깊어서 화해할 수가 없어요'라고 한다면 이해합니다. '부모한테 매일 학대를 당했는데 그게 가능하겠습니까?'라고 한다면 맞는 말씀입니다. 어려울 겁니다. 당신이 어려우면 어려운 것이 맞습니다. 괴로우면 괴로운 것이 맞습니다. 당신이 자신과의 화해를 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이 맞습니다. 당신의 그 느낌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제가 감히 그렇게까지 괴로울 필요가 있을까요? 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어떤 필요에 의해서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냥 본인이 괴로우면 괴로운 겁니다. 그게 맞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고맙습니다. 저에게 사연을 보내준 분들이, 제 칼럼을 읽어준 분들이, 강연이든 병원이든 블로그든 저를 찾아와 준 모든 분이 그리고 이 책을 집어 펼쳐준 당신이 무척 고맙습니다. 누구한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어려운 이야기를 내어놓은 것조차 너무 고통스러운 자신의 깊은 상처를 저라는 사람에게 글로 써서 보내준 것이 고마워요. 진정한 속마음을 저에게 말해준 것이 고맙습니다. 그 깊은 고통에 대해서 단지 몇 줄의 글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는 데도 읽어주어서 고맙습니다. 다시 끌어내 생각하는 것조차 고통일 텐데 다시 한번 내면의 고통을 들여다봐 주어서 고맙습니다. 그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일면식도 없는 저라는 사람에게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는 그분들 그리고 당신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이 말은 꼭 드리고 싶습니다. 그때 상처받았고 지금도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그 자체가 당신에게 힘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힘들고 아픈 상처를 다시 들여다보고 다시 이야기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게 아팠는데 아무렇게나 살지 않고 버틴 거 그것은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증거이기도 하고 당신 안에 엄청난 힘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가 나아지려면 그것에 대한 본질을 인식해야 합니다. 신문에 사연을 보낸 분들은 저를 찾아준 분들은 이 책을 집어든 당신은 그 인식을 가진 분입니다. 더 가벼운 사람들은 문제 자체도 인식하지 못하는 분들입니다. 왜 괴로운지 모르고 괴로워만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당신은 문제를 인식했기 때문에 이 책의 첫 장을 펼쳤습니다. 당신은 내면에 그런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인식이 있을 뿐 아니라 그렇게 상처받지 않았더라도 보이지 않는 인간의 갈등이나 고통, 인간의 상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부분에 눈을 뜬 사람입니다. 이곳은 당신의 엄청난 내적 자원입니다. 저는 당신이 그 힘을 좀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어가며 당신의 그 힘이 더 단단해져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에는 수많은 '나'가 등장합니다. 나는 사실 우리입니다. 그리고 당신입니다. 제 부족한 글이 당신에게 위로가 되어 흔들리는 삶 속에서도 좀 더 고요하고 단단한 마음을 갖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감히 희망해 봅니다.

 

부모가 돼서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부모는 어떤 존재이기에 이렇게 아플까요? 스물이 조금 넘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저를 만나러 올 때 여름에도 가끔 빨간 목도리를 두르곤 했습니다. 중학생 때부터 저와 만나온 청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더운 여름에 빨간 목도리를 두른 젊은 남자를 종종 이상하게 쳐다봐왔습니다. 청년의 어머니는 청년이 초등학교 때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생이 몇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는 빨간 털실을 몇 뭉치 사셨답니다. 그리고 매일매일 아들의 목도리를 떴습니다. 청년은 어머니가 보고 싶은 날이면 빨간 목도리를 둘렀습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곁에 있는 것처럼 마음이 따뜻해지고 평안해진다고 했습니다. 부모란 자식에게 어떤 존재일까요? 얼마 전에 만난 20대 중반의 여자는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진다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부모님이 이혼을 하셨고 여자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18살 어느 겨울밤 밤새 너무너무 아파 앓다가 다음 날 새벽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혼자서 응급실에 갔습니다. 어머니는 옆방에서 주무시고 계셨지만 걱정하실까 봐 깨우지 않고 혼자 갔습니다. 아침까지 응급실에 있다가 열이 내려 집으로 돌아왔는데 어머니는 여전히 주무시고 있었어요. 그녀는 어머니에게 '엄마, 나 너무 아파서 새벽에 응급실 갔다 왔어.'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나도 너 아픈 거 알고 있었어.'라고 대답했답니다. 여자는 깜짝 놀라 '엄마, 아는데 왜 그냥 있었어?'라고 물었더니 엄마는 '다음 날 출근해야 하잖아' 하셨습니다. 여자는 어머니라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이기적일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가슴이 무너졌습니다. 부모란 아이에게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요? 부모는 아이에게 우주입니다. 그 우주가 안전하고 그 우주에서 사랑받고 존중받는다고 느끼고 신뢰가 형성되어야 아이는 편안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부모는 부모라는 이름으로 아이에게 해야 하는 상호작용이 있고 주어야 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이가 부모에게 자랄 때만 주는 것이 아니라 조건 없이 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받았다고 느끼는 아이는 부모가 곁에 없어도 편안합니다. 이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는 부모가 곁에 있어도 불안합니다. 부모가 곁에 있어서 더 불행합니다. 아버지는 맨날 술만 마시면 어머니를 때렸습니다. 어느 날 밤 어머니는 아버지가 잠든 사이 짐을 챙겼습니다. 집을 나가려고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나는 말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깨기 전에 얼른 가라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이제는 아버지한테 더 이상 맞지 않아서 다행이라고까지 생각했습니다. 어머니가 나가고 매일 주사를 하는 아버지 밑에서 어린 동생과 정말 힘들게 살았습니다. 제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나니 자꾸 그때 집을 나서던 어머니의 뒷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어머니한테 맞은 기억뿐입니다. 공부를 못한다고 맞고 방 정리를 안 해서 맞고 전화를 안 받아서 맞고 동생과 싸워서 맞고 어머니는 감정 조절을 잘 못했습니다. 기분이 좋으면 부드러웠다가 아주 작은 일에도 무섭도록 차가워지고 순식간에 폭발했습니다. 저희는 오락가락하는 어머니의 기분에 따라 속절없이 맞았답니다. 아버지는 그런 우리를 그냥 모른 채 했습니다. 보호해 주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때 사촌 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그때는 그걸 그냥 제 잘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부모님께 말하지 못했습니다. 혼날 것 같았습니다. 저를 버릴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자주 때렸고 어머니는 그럴 때마다 저와 동생을 고아원에 갖다 준다고 했습니다. 몇 년이 지나 그 사실을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알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그냥 덮고 살자고 했습니다. 버림받은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부모 때문에 더 불행했던 수많은 나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마치 쏟아지는 장대비를 맞고 있는 온몸이 상처 투성이인 어린 새 같았습니다. 이제 비는 그쳤지만 절뚝거리는 어린 새는 하늘을 날아오르는 방법을 잊어버렸습니다. 다시 날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날개를 파닥거려 보지만 여전히 상처가 송곳이 되어 자꾸만 심장을 찌릅니다. 날 수가 없습니다. 심장이 너무 아파 숨쉬기도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부모는 어떤 존재이기에 자녀를 이렇게 힘들게 만든 걸까요? 부모는 아이에게 생명의 시작이자 생존의 기반이에요. 그리고 전쟁터에 방공호 같은 존재입니다. 아이는 부모가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몸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습니다. 아이는 부모에게 조건 없이 수용받아본 경험, 깊고 따뜻한 사랑으로 삽니다. 아이는 부모에게 사랑받았던 기억으로 평생을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그런데 많은 나의 부모님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비난과 간섭, 폭언과 폭행을 일삼았습니다. 나를 버리려고도 했습니다. 내가 위험에 노출되었는데도 목숨 걸고 지켜주기는커녕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죽을 만큼 힘든 상황인데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철없는 어린아이여야 하는 내가 부모의 비위를 맞추고 챙기며 가정을 지켜야 했습니다. 안식처가 되기는커녕 신발도 신지 않은 아이를 전쟁터에 홀로 내버려 둔 것입니다.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알 수 없는 상황 얼마나 불안했을까, 사파리 맹수 우리에 아이를 혼자 남겨 놓은 것입니다. 사방에서 으르렁거리는 맹수 소리 얼마나 무서웠을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망막 내에 아이 혼자 돛단배를 태운 채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얼마나 막막했을까. 나는 아이를 이렇게 대했던 사람들을 과연 부모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의 부모는 어떻게 부모로서 자식에게 이럴 수 있었을까? 부모를 미워해도 괜찮습니다. 흥행에 크게 성공했던 공공의 적이라는 영화를 기억하시나요? 이 영화가 개봉되었을 당시 영화를 보는 내내 너무 공포스러웠다며 눈물을 흘리면서 저에게 뛰어온 사람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그들이 무서워한 것은 냉혹한 살인마인 조교환이 별 것도 아닌 일로 사람을 쉽게 죽이는 장면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조교환은 펀드 매니저였습니다. 부모에게 큰돈을 받아 주식에 투자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그 돈을 복지시설에 기부하겠다며 돌려달라고 했습니다. 며칠만 있으면 돈이 몇 배로 불어날 것 같은데 부모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부모님을 처참히 살해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장면에서 숨겨둔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숨겨둔 자기 자신이란 끊임없이 잔소리와 비난을 하는 부모에게 그만하세요. 그만하세요. 제발 그만하라고요.라고 외친 적이 있던 나입니다. 그만하라고 말해도 계속해서 똑같은 비난을 하는 부모에게 닥치라고 하고 싶었던 나예요. 자신이 어떻게 처리할 수 없었던, 자신조차도 두려운 부모에 대한 적개심을 가졌던 나입니다. 폭력적으로 대하는 아버지를 밀치고 뛰어갈 때 바닥에 나동그라진 아버지를 보고 스스로도 놀랐던 자신의 폭력성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고통스러웠던 폭력성을 가진 나를 말합니다. 어느 날 문득 오래전 일기장을 펼쳤는데 엄마가 죽이고 싶도록 밉다. 아빠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라는 한 구절을 발견하고는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고 드러나면 너무나 두려운 자기 안에 엄청난 분노심을 가졌던 나를 말하는 겁니다. 영화는 사이코패스인 아들이 저지른 문제지만 많은 사람이 그 영화를 보면서 자신의 내면에 해결되지 않은 고통스러운 갈등의 모습이 건드려져서 두려웠던 겁니다. 왜 이들은 이런 자신의 마음을 발견하고 무서워했을까요? 자식은 부모가 어떤 사람이든 부모를 미워하는 마음, 싫어하는 마음을 품는 것이 굉장히 불편합니다. 그런 마음을 갖는 자신이 괴롭습니다. 부모를 미워하는 것은 친구를 미하는 것과 다릅니다. 나를 나쁘게 대했던 선생님을 미워하는 것과도 다릅니다. 부모는 마음 놓고 미워할 수 없는 대상입니다. 그저 미워하는 마음도 이 정도인데 한순간이라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적개심을 가졌었다면 어떨까요?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을 겁니다. 아마 언제까지나 마음속 깊은 곳에 꽁꽁 숨겨두고 부인하며 살고 싶었을 겁니다. 그런데 영화를 통해 그 마음을 자신에게 들킨 겁니다. 이제 30대 중반이 된 한 여자도 그랬습니다. 어릴 적 그녀의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폭력적으로 변했답니다. 아버지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119 구급차에 실려가게 되었는데 그때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습니다. 제발 깨어나지 마라 제발. 그녀는 잠시라도 그런 마음을 가졌다는 것에 괴로워했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어디를 가든 그 집 딸 참 착해 너는 정말 좋은 아이야 라는 칭찬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착하고 모범적인 아이였습니다. 그랬기에 더더욱 자기 안에 있는 그런 어두운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나쁜 부모였어도 그런 생각을 하다니 자신이 끔찍하게 느껴졌습니다. 마음 저 밑바닥에 그 고통을 묻어두고는 그 여자는 문득문득 자기 자신을 미워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 가져도 됩니다. 인간의 무의식을 다루는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저 깊은 무의식에는 죽을 만큼 힘들고 괴로우면 나라는 존재를 최소한 유지하기 위해서 나를 낳아준 부모라도 죽이고 싶을 강도에 아주 감당하기 어려운 분노와 적개심과 절망감이 생긴다고 합니다. 무의식적인 정신 분석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은 굉장히 처절한 고통입니다. 그 마음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40대 초반의 남자는 부모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두렵고 공포스러웠고, 부모의 말과 행동이 고통이 되어 그 상처의 처절함에 몸부림쳤다고 했습니다. 부모를 볼 때 적개심을 느낀 적이 있었다고 고백하며 물었습니다. 저 같은 인간이 살 자격이 있을까요? 자아의 기능 중 현실 검증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주 본능적이고 충동적인 나의 모습을 현실에 맞게 검증해서 인간답게 행동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평생 동안 갖추려고 노력해야 하는 중요한 기능입니다. 인간은 어떤 계기로 나쁜 마음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못된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마음이 드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마음은 언제나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을 가졌지만 행하지 않았다면 괜찮습니다. 잘 살고 있는 겁니다. 나의 정신은 건강한 겁니다. 어린 시절 학대했던 부모를 용서하고 이제 그만 자기 안에 상처받은 어린아이를 낳게 해주고 싶다가도 어릴 때 기억이 떠오르면 또다시 부모가 미워집니다. 가장 많이 사랑하고 어떤 경우에도 보호해줘야 하는 사람이 나를 감정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공격했다는 것은 아이에게 엄청난 고통과 절망입니다. 그래서 성인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부모를 미워하고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사사건건 지나치게 간섭하는 부모 때문에 괴롭습니다. 나이가 서른이 넘었고 번듯한 직장까지 다니고 있지만 부모는 언제나 당신 말만 맞다고 하고 당신 말만 따르라고 합니다. 조금이라도 싫은 내색을 보이면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거야 하며 서운해합니다. 이렇게 침습적인 부모가 있어요. 습자지에 물이 스미듯이 자녀의 인생에 침습하는 사람들입니다. 때리고 욕하는 공격의 형태는 아니지만 아주 수동적인 방식으로 집요하게 자식들의 인생에 스며듭니다. 자식이 스스로의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요구하는 삶을 살도록 강요합니다. 이것은 자식을 미치도록 힘들게 합니다. 이러면 자식은 내 부모 같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결혼도 하기 싫고 아이를 낳기도 싫어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자식이라도 부모가 싫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너무너무 밉기도 합니다. 분노도 느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 감정을 두려워합니다. 버리지도 못하고 미워하지도 못하는 부모에게 갖는 그 당연한 감정에 오히려 자신이 더 불안해하고 괴로워합니다. 사실 그런 부모 밑에서 미움이나 분노보다 두려움을 더 크게 갖는다는 것은 이미 나는 그 부모보다 성숙한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스스로 올바르게 성장하기 위해 많은 순간 자신을 채찍질해 왔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그런 불안과 두려움은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의 순간 꼭 나의 발목을 잡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다른 길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참으로 가볍고 안쓰러운 일입니다. 어머니 같은 엄마가 되지 않겠다, 아버지 같은 아빠가 되지 않겠다 등등은 부모로부터 깊은 상처를 입었을 때 하는 말입니다. 이 말에는 기본적으로 미움이라는 감정이 있어요. 담고 싶지 않다는 자체가 갖고 있는 의미가 그 대상에 대한 내 마음이 미유, 싫어함, 분노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부모 같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가장 먼저 부모가 밉다, 부모가 싫다는 내 감정부터 인정해야 합니다. 너무 싫은 마음, 너무 미운 마음이 많으면 부모라는 사람을 극복하기가 어렵습니다. 미움과 분노에 지나치게 휩싸여 있으면 그들로부터 내가 받은 영향력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생각보다 자신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나를 제대로 알려면 나조차도 나에게서 한 발 떨어져 봐야 합니다. 그런데 감정은 강한데 그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면 한 발 떨어져 볼 수가 없습니다. 내가 이런 것으로 인해 이런 영향을 받았구나, 이 영향 때문에 이런 생각을 갖게 됐구나 그것 때문에 내가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구나 이런 것들이 나의 마음 안에 자리를 잡고 있구나 이런 마음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을 이렇게 바라보는구나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부모로 인해 생겨난 상처로 많이 고통스럽다면 부모에게 화가 나고 분노가 느껴집니다. 당연히 느껴지는 그 감정을 인정한다고 나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부모에게 받은 상처를 해결하려면 우선 나의 마음부터 인식해야 합니다. 나의 마음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나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나의 마음을 알아차린 다음에 내 스스로 그 마음을 소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내가 갖는 감정부터 인정하여야 합니다. 미우면 미워하는 감정을 가져도 괜찮습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 분노의 마음으로부터 도망가지 말라. 그런 감정을 갖는 것도 지나치게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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